디자인 칼럼
그릇, 계절을 즐기는 또 하나의 즐거움
  • 디자인포럼 에디터
  • 2017.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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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릇, 계절을 즐기는 또 하나의 즐거움

정희정(객원 에디터/문화사학자)
 
봄이 오면 쑥국을 먹어야 하고, 복날이면 삼계탕을, 가을이 오면 왠지 전어를 먹어야할 거 같습니다.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뚜렷해서 계절에 따른 제철음식이 있고, 때에 맞는 음식을 먹는 것은 계절을 즐기는 즐거움 중 하나이기 때문이지요.
 
일본에서는 계절에 따라 음식 뿐 아니라 그릇을 바꾼다고 합니다. 봄이 오면 꽃 모양, 가을이 되면 단풍의 느낌이 나는 그릇으로요. 참 멋진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 우리나라는 어떤가요?
 
언제부터인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집안에서는 도자기와 유기로 만든 그릇을 갖추고 계절에 따라 달리 사용했었습니다. 대체로 단오부터 추석까지 도자기를 사용하고 추석 전후해서 유기그릇을 꺼내 사용을 시작했지요. 그래서 유기그릇에 낀 녹을 닦기 위해 기왓장 가루로 문질렀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는 한동안 유기를 사용하지 않다가 꺼내기 때문입니다. 한편 조선시대, 정확히는 대한제국시기 마지막 상궁이었던 분의 이야기에 의하면 왕실에서는 유기 대신에 은그릇을 계절에 따라 달리 사용하였다고 하지요.
 
최근 종가 종부님들께 여쭤보니, 보통 집안 어른의 제사를 기해서 그릇을 바꾼다고 하는 등 집안마다 그릇을 바꾸는 시점이 조금씩 다르네요. 아마 지역에 따라 계절감이 조금은 달라 그런 거 같은데, 대체로 남부로 내려갈수록 조금씩 유기 사용을 시작하는 시기가 늦어지는 듯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멋들어진 음식문화를 가졌는지 생각이나 해봤습니까? 이렇게 멋진 문화를 우리도 가졌었다는 이야기를 디자이너인 친구에게 해줬습니다. 그 때 마침 그 디자이너는 우리나라 유명한 한정식집의 신규 지점을 위한 디자인을 담당하고 있었고, 실제 여러 유기를 접해보고는 그 지점의 그릇을 모두 유기로 마련했었습니다. 다소 무겁지만 음식을 담았을 때 은근한 고급스러움이 일품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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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도자 반상기 출처=이화여대 박물관 도록 <상차림의 미학> (우)유기 반상기, 출처 = 방짜유기박물관, 공유마당 >

 

한국과 일본은 닮은 듯, 다른 나라입니다. 뚜렷한 사계절로 음식문화가 발달했고, 그릇이 발달했는데, 일본이 계절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하였다면, 우리나라는 그릇의 모양을 그대로 둔 채 기능적인 측면을 중시하여 재질의 변화라는 계절감을 즐겼다는 사실이 참 흥미롭습니다. 유기는 조선시대에 매우 비싼, 도자기의 거의 3배의 가격이라 어느 집이나 마련할 수 있는 건 아니었습니다. 그 비싼 그릇을 주로 온기가 사라진 계절에 사용했다는 것은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하지만 아직 좀 더 연구가 필요하네요.

한동안 우리의 밥상에서는 유기가 거의 사라졌지요. 바로 그 이유는 일제강점기 말에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필요한 금속을 확보하기 위해 유기를 공출하였기 때문이랍니다. 역사시간에 ‘일본이 전쟁을 위해 유기그릇을 빼앗아 갔다.’ ‘제기라도 빼앗기지 않으려고 몰래 숨겼다.’ 라고 문자로 기록되고, 언어로 전달됩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우리의 일상을 뿌리째 흔들어 버렸고, 이젠 우리가 이렇게 아름다운 음식문화를 가졌다는 것조차 기억하지도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 실상을 금속헌납, 유기헌납이라는 이름으로 촬영된 기념사진으로 가름할 수 있습니다. 한 마을에서, 한 학교에서 걷은 유기의 양이 보통 이 정도이니 전국단위로는 어마어마한 양의 유기를 걷어 일제강점기 중 가장 많은 자원유출이 이때 유기로 걷어간 거라고 합니다. 그것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전쟁에 사용할 금속 공출을 독려하기 위해 ‘헌납’이라는 미명을 씌워 기념사진을 찍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중적 폭력성에 말문이 막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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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진출처 = 부평역사박물관 소장품 >

전쟁의 시간이 지나고, 식민지 시기가 끝났어도 우리의 밥상으로 유기는 쉽게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최근에 유기가 다시 그릇의 재료로 관심을 받는 것이 다행스럽게 여겨집니다. 유기는 무게나 관리의 어려움 때문에 자연스럽게 사라진 것이 아니라 정치적 이유로 사라졌던 그릇이니까요. 오랜 시절 한국인이 사랑했던 유기가 오늘날의 방식으로 아름답게 잘 사용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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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정은 이화여대에서 식품영양학 학부, 석사, 박사 과정을 거쳤으며 홍익대 대학원에서 미술사학을 공부했다. 가나아트센터 큐레이터, 국립문화재연구소 연구원 등으로 근무했으며 현재 이화여대 연구원으로 각종 문화관련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공동저서로 <종가의 제례와 음식> 시리즈, <한국의 무형문화재 시리즈 – 채상장> 등을 저술했다. 정희정은 특히 한국의 음식문화를 연구하고 미술사를 전공하는 과정에서 그릇의 역사와 쓰임에 큰 관심을 갖고 그릇과 조리도구의 디자인, 담음과 차림이 잘 어우러진 상차림의 중요성에 대해 즐겨 얘기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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